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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십일조, 예수님의 뜻인가?

by bogosipn 2008. 8. 22.
한국 기독교의 십일조, 예수님의 뜻인가?



=닉 기록하였으되=

십일조 [十一租, tithe]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敎區民)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였던 세.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한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야훼신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십일조가 처음에는 이를 그리스도교도가 하느님에게 자의(自意)로 즐겨 바치는 경건한 신앙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公議會, 1078)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수입의 1/14 또는 1/15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1789∼1790년 대혁명의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십일조는 엄청난 것입니다.

엄청나기 때문에 포기하기 힘든 것입니다.

유독 한국에서만 맹위를 가진 십일조.

십일조가 걷어져 어디에 쓰이는 지 구석구석 살펴봐야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야훼는 나를 위해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 했습니다.

일단 성전(교회)를 짓기 위해는 물론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걷어져서도 안됩니다.

십일조 말고도 여러 명목의 헌금이 존재합니다.

다듬은 돌에 해당하는 건축헌금도 존재합니다.

폐지해야할 수많은 헌금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시급한 것이 십일조 폐지입니다.

 

십일조제도는 한국의 돌팔이 교수, 삯꾼 신학자들이

빵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3대 근성 (명예-권위-탐욕) 에 눈이 먼 먹사 집단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범죄행위입니다.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십일조는 범죄행위이며 걷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십일조를 걷는 것은 하느(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원과 1%도 상관없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면 모두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을 십자가 보혈로 완성하신 예수님 덕분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제사장이 되는것이 아니라 레위지파의 자손들만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할수 있습니다.

2) 건물안쪽에 연기가 나오는곳이 지성소(내소)라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인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십계명을 보관한 언약궤를 보좌삼아 거처를 하신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며 1년에 한번 대속죄일날에 대 제사장만 들어갈수 있습니다.

3) 어린양과 짐승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고 그 고기는 각을떠서 번제단(불이 솟구치는 그림참조) 에 올려놓고 태워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잡을때 나오는 짐승의 피는 통에 받아서 성소에(외소)에 들어가 제사장이 손에 발라 성소에 뿌립니다. 그리하면 백성들의 죄는 성소로 넘어갔다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예식을 통하여 넘기고 준비한 아사셀 수염소에게 안수하고 그 수염소를 광야에 풀어놓으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수염소가 안고 죽게되는 것입니다. ( 아사셀 수염소는 마귀로 표상된 짐승이며 죄의 근본인 마귀가 마지막에 모든죄를 가지고 죽게될 예언입니다.)

십일조를 명하신 이유

1)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지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인원은 때에따라 다르나 천만명정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중에 한지파인 레위지파는 다른일을 하지 못하며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일을 담당합니다. 그러니 생활할 수입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11지파에게 명하여 소득의 10분의 1씩을 거출하여 제사장인 레위지파를 도우라고 명하신 규례가 십일조법입니다.

민18장21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성소)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십일조 규례는 다른 사람들이 받을수 없으며 오직 레위지파에게만 허락하신 규례입니다. 레위지파가 십일조를 받게된 이유는 성소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천만인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이 한두명이 아니라 수만에서 수십만의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레위지파는 다른 노동을 할수 없기에 다른 11지파에게 십일조를 받아서 생활을 했던것입니다.

성소가 없어지면 제사일이 폐해지고 제사일을 행하는 레위지파도 필요가 없다. 또한  레위지파를 위해 주어지던 십일조 규례도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1)구약시대에는 건물이 성전이나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입니다.

고후6장16절(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우리(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2)예수님은 보이는 성전(건물)을 헐라 하시고 새로운 성전인 성도들을 세우려 하셨습니다.

요2장19절(예수께서 그들(유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3)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건물이 성전이었기에 성전일을 행하는 레위지파가 필요했고 그들을 위한 십일조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전된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봉사는 성도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마음을 거룩히하고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산 제사 즉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십일조는 구약시대 성소일을 행하던 레위지파만 받을 권리가 있는것일뿐 그 외 누구에게도 받으라고 명하신적이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먹사들이 십일조를 받고 싶으면 유대인들처럼 성전(건물)을 만들고 양잡아 제사를 지키며 일만가지 구약의 율법을 행해야 하며 이스라엘로 가서 레위지파에 가입을 하셔야하나 받아줄지 모르겠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폐하셨습니다.


위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닉 빛나는쇠=

십일조는 불법이 아닙니다^^

십일조가 율법이고 율법은 폐하였다고 하시는데,,,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십일조의 시작은 멜기세덱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 그대의 원수를 그대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어라."아브람은 자기가 가진 것 전부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창세기 14:18절


아브라함의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위의 아브람의 행위가 율법이라고생각 하십니까?

그렇다면 이구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하여주시고 저를 지켜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주신다면, 저는 야훼님을 제 하느님으로 모시고,

제가 세운 이 석상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창세기 28장 20절


야곱이 드린 것은 서원한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율법을 가지고 서원한 것입니까?

즉,,,, 지켜야 할 것을 가지고 제 소원을 들어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야곱이 서원한 십일조는 야곱과 멜기세덱의 십일조가 율법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자발적 십일조를 토대로 후에 율법의 십일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원래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구절들에 십일조는 자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멜기세덱은 무슨 관계입니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8절

즉,,,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원형이셨던 것입니다,,,

=======사제들도 십분의 일을 받고 멜기세덱도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사제들은 언젠가는 죽을 사람들이고 멜기세덱은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8절


=======그런데 이 레위 계통의 제사직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으로 지령을 받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제사직으로 완전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아론의 서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다른 제사장이 생겨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7장11절

보셧죠,,, 멜기세덱의 제사장이 완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멜기세덱이 십일조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시죠,,,?^^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의 십일조 규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복음 활동과 물질적 기부 양면으로

그리스도인 봉사를 지원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며 제단을 맡아보는 사람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정해 주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11절


=======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마가복음 12장 41~44절

교회의 비용을 충당하려고 특별히 정해진 액수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따라” 헌금하고

“자기 마음에 작정한 대로” 내며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즐거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후서 8:12; 9:7)

 

사도 바울은 회중에게 재정적으로 무거운 짐을 부당하게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한 면에서 본을 세웠다.

―사도행전 18:3; 데살로니가 전서 2:9


십일조의 기원이나 성경 어느 곳을 봐도 오늘날 문자적인 십일조의 강제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에게 바치는 십일조는 율법도 아니며 불법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위글에 대한 반론!

=닉 착한앙마=

십일조는 비성경적이다.

십일조 문제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같은 논란거리인 것 같다. 사실 이 문제는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이미 신학적, 신앙적 정리가 끝나서 지금은 어느 국가의 교회에서도 시행하지않는 종교행위인데, 유독 한국-특히 개신교계에서만 아직도 살아 남아서 여러가지 신앙적 혼란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우선 이 십일조 논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간략히 그 논란의 요점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첫째, 십일조 헌금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십일조 헌금은 성경에 따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므로 신자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이라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한 번 살펴보자.

1).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 ( 신명기 14장 / 26장)

하나님의 명령도 한시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시대를 초월하여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제사도 드려야하고, 오징어도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되고, 할례도 다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 율법들은 모두 다 한시적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신약시대 이후는 그런 것은 다 지나간 구시대의 법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일조 법도 성전과 제사제도가 존재했던 구약시대에만 필요했던 하나님의 명령이요 율법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라는 특수 지파가 있었다. 그들은 제사임무를 위해서 따로 구별된 지파이고 그들에게는 먹고 살 땅이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11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난 소출중에서 10분의 1을 거둬서 그들에게 준 것이다. 이것이 십일조 법의 기본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AD 70년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다 풍지박산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이란 국가자체도 없어지고 성전도 제사도 없어진 마당에 당연히 레위인도 십일조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시말하면 십일조는 그것을 거두어 나눠줄 대상이 있을 때 필요했던 한시적 율법이란 말이다. (물론 십일조 정신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눔의 정신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성직자가 레위인들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혀 아이다. 지금의 개신교회에는 신분상 제사장이란 직분은 없다. 목사란 똑같은 신자로서 다만 직무에 따른 구분일 뿐이지, (오히려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카톨릭조차도 십일조란 명목의 헌금은 걷지 않는다.)

2).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쳐야 한다?: (말라기 3장 8절에 대한 해석):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라기 3장 8절)

이것도 역시 그 문맥과 의미를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한 행태를 질책하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우선, '도적질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일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이다. 그 당시 그들은 그런 헌물을 그 본래의 뜻대로 잘 나눠주고 잘 쓰지않고 제멋대로 자기들 뱃속에 착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도적놈들이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불한당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 뭐라구?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헌물'이란 의무적으로 바쳐야하는 것이 아니라 즉 헌물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저 스스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일단 바쳐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소위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실까? 그 뜻은 '하나님의 것'이란-- "곤궁한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과 레위인들에게 마땅히 분배되어야 할 헌물들"-- 을 가리 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소유권"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쓰여져야할 데 쓰여져야만 한다는 데, 즉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려고 "하나님의 것" 이라고 하는 것이지 쉽게 풀어보면, "그것들은 도적놈들 너희가 마음대로 먹어치워도 좋은 '너희들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바로 '내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것'이란 십일조 그 자체가 아니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3).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셨다? (누가 11장 42절에 대한 해석):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장 42절/ 마태 23장 23절)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 역시 십일조를 드려야 하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런 뜻일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그 당시 시대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 여러가지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이다. 결코 십일조를 잘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 제단과 성전이 있었다. 당연히 레위인도 있었고. 또한 다른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십일조가 필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즉 이것 역시 그 시대에 국한된 말씀이란 뜻이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옳지 않을까?

그러면 전도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지금도 전도하는 사람은 돈주머니도 두벌 옷도 두벌 신발도 없이 달랑 샌들 하나 신고 단벌 옷에 돈도없이 다녀야 하지 않을까? 또한 산상수훈의 명령들은 어떻게 지키며 과연 그대로 하고 있나?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으면서 왜 십일조만은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장 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경구절을 들어서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는것은 너무나 웃기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신약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는 성전체제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된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4). 십일조가 율법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준 것이지 이를 율법의 십일조로 생각할 근거가 없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전승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준 것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종종 있어왔던 것이라고 한다. 즉 십분의 일을 준 것은 그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의 십일조의 효시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의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야곱은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 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닐뿐더러 이것이 어떻게 율법의 십일조 정신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주고 받기" 식의 거래일 뿐이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곱역시 그런 약속을 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한번도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연히 그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바친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고 십일조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절대 성경적이지 않다.

2.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일체의 의무적 율법은 폐지 되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을 폐지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다 (갈 5장). 그러므로 이제는 신약시대의 신자에겐 율법적 의무란 없다. 다만 자발적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초대교회 최초의 공의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결정된 것은 할례를 포함한 일체의 율법적 의무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적 의무였던 십일조도 폐지된 것이다.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뜻을 안다면 마땅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율법적 규정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 사건이후에 모든 율법은 없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말씀은 과거의 것을 폐지하고 더 좋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셨다는 말이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폐지하시고 더 좋은 자유로운 사랑의 구제헌금인 "연보"로 대체하신 것이다. 이 연보란 개념속에는 결코 율법이나 의무개념이 없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자발적 헌금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안식일은 주일로, 할례는 세례로, 유월절 만찬은 성찬식으로 등등, 다른 율법들은 다 바꾸면서도 유독 십일조만은 아직도 존속시키려고 하는지 그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셋째, 십일조 제도의 폐해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십일조 할 사람은 하고 자유롭게 놔두면 되지 않냐고..

아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한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것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나쁜 종양은 빨리 도려내는 것이 좋듯이.. ....

십일조가 일으키는 문제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십일조를 그냥두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다시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도 그냥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괜찮치 않느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회귀시키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고 갈파하는 것이다.

2). 교회가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심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십일조를 잘못 걷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않고 쌓아두거나 엉뚱하게 건물짓는데 쓴다는 둥, 하게 되면 교회가 부를 인하여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돈의 유혹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그래서 돈과 하나님은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로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돌아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점점 중세의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다. 그 원인 중에는 교회에 돈과 권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는 데 십일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쌓이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잘 모르고 십일조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부패를 조장시켜주는 일에 동참하는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업은 무슨 돈으로 하냐구? 교회는 사업을 위한 조직이 아니다. 다만 신자들 하나 하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밖의 일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돈 없어도 교회는 존재한다. 성장할 수 있다. 부흥할 수 있다. 오히려 돈이 없을 때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될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듯이 교회도 재산이 많아지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미 중세의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3). 신자들에게 물질주의적인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흔히들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제대로 잘 나눠주라는 말씀이지 백성들에게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십일조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순전히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것이다.

목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무 약효도 없는 가짜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파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치는 것이다.

또한 신자들 역시 문제이다. 신자들의 경우도 십일조를 함으로 더 많은 물질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잘못된 욕심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이지.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실상은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그게 지금의 교회 현실이다.

참고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십일조를 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십일조를 거둬서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이웃을 위해서 전액 제대로 쓰여질 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신명기 26장). 그러므로 진정 복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 제대로 쓰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4). 잘못된 죄책감만 조장시키고 형식적, 외식적 신앙행태를 조장한다.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자꾸만 십일조를 강요하다시피 강조하는 것은 자칫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니면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쓸데없는 죄의식때문에 즐거워야할 신앙생활이 잔뜩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기껏 벗겨놓으신 짐을 또다시 걸머지고 가려는 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4. 마지막으로, 올바른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구약의 십일조 법에는 과부와 고아등 그 지역안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십일조를 거둬서 나눠주도록 되어있는데, 이 정신은 참으로 본받아야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명기 26장)

지금도 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헌금의 명목은 구제금이나 사랑의 헌금 등의 명목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신약에 의하면 그런 것을 일컬어 "연보"라고 하고 있다. 연보의 의미는 "자기 것을 버려서 남의 부족한 것을 메꾼다"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거뒀다면 당연히 그 전액을 다 그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십일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헌금이어야 하는 것이지 '십일조 법' 같은 어떤 종교적 의무로 규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순수한 정신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외식적이고 형식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결론적으로, 이 십일조를 여전히 지키겠다는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것은 십일조를 폐지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도 하고, 모든 율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대치해 놓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기복신앙과 물질숭배로 치닫게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개혁은 바로 이 십일조 폐지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완전공감하는 주장입니다!
(from. Ag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