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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닐다

장하준의 스페인 바라보기

by bogosipn 2010. 11. 6.
지난달 28일 세계 3대 신용평가사하나피치스페인 국가신용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로 강등시키면서 그리스에서 시작한 국가채무 위기가 유럽 다른 나라들로 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3대 신용평가사 중 무디스는 아직 스페인 신용등급을 낮추지 않았지만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이미 4월에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피치의 결정으로 3대 신용평가사 중 ‘과반수’가 스페인을 강등시킨 결과가 됐다.

스페인으로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재정적자가 국민총생산(GDP)의 11%가량이지만 14%에 달하는 그리스보다는 훨씬 낮고 미국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남부 휴양지를 중심으로 생성된 ‘부동산 거품’이 꺼져 큰 곤란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부동산 담보대출에 최소한의 규제는 했기에 미국이나 아일랜드 등에 비해서는 부동산 관련 악성대출 비율이 훨씬 낮다. 그리고 악성부채가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지금까지는 미국 영국 아일랜드 등에 비하면 금융권에 투입된 공적자금도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도 신용등급이 깎이니 얼마나 애가 탈 것인가.

스페인 입장에서 더욱 기가 찬 일은 피치가 신용등급 강등의 가장 큰 이유로 정부지출 삭감에 따른 경기침체 우려를 들었다는 점이다. 스페인 정부는 공무원 봉급 삭감, 연금 동결, 정부 투자 삭감 등을 통해 2009년 기준 GDP 대비 11%였던 재정적자를 2011까지 6%, 2013년까지 3%로 낮추는 법안을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간신히 통과시켰다.

이렇게 혹독한 긴축정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신용평가사들을 포함한 금융권에서 “스페인은 재정적자 규모가 너무 커서 빨리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긴축정책을 쓰기로 했더니 이제는 긴축정책 때문에 경제성장이 어려워 부채상환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신용등급을 깎은 것이다.

필자는 피치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한다. 실업률이 20%가 넘을 정도로 경기가 안 좋은 스페인이 급격하게 재정적자를 줄이면 경기가 더 침체되고, 그 결과 세수가 줄어 재정적자가 의도한 만큼 줄지 않거나, 심한 경우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이 맞는다면, 왜 피치는 애당초 스페인이 급격히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했을까?

한마디로 신용평가사들이 제대로 된 신용평가를 할 능력도, 의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 때 겪었던 일이다. 국가신용 평가에서 이들은 시장 분위기를 따라가지 독자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다. 우리나라에 대해 1997년 여름까지도 계속 좋다고 얘기하더니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 위기에 빠지고 투자자들이 혹시 한국도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덥석덥석 내려 우리 경제위기를 악화시킨 일, 기억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나라에 대한 신용등급은 ‘뒷북치기’ 정도지만 기업이나 금융상품의 신용등급을 보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신용평가사들은 소위 ‘독성자산’에 AAA 등급을 남발해 이번 금융위기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공개된, S&P 간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가 극단적인 예다.

신용등급 부과 요청이 들어온 어느 주택담보대출 파생상품에 대해 S&P의 한 간부가 “너무 위험하니 등급을 안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상급자로 추정되는) 다른 간부는 “소가 만든 금융상품도 돈만 내면 등급을 매겨주는 게 우리 원칙”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신용평가사들은 돈을 더 많이 내는 고객에게 더 좋은 등급을 준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최근 여러 청문회나 금융권 수사 과정에서 구체적 증거가 속속 공개되고 있다.

기존 신용평가사들이 이렇게 엉성하다면 왜 경쟁자들이 나와 더 좋은 신용평가를 제공하지 않는 것일까? 불행히도, 기존 기업이 비효율적이면 경쟁자가 등장해 도태시킨다는 것은 경제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신용평가같이 과점체제로 유지되고 있는 산업에서는 새로운 경쟁사가 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시장에 맡겨서는 신용평가업계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다. 공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우선 신용평가사들의 ‘성적표’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이 평가사들이 어떤 나라, 어떤 기업, 어떤 자산을 어떻게 평가했고, 그렇게 평가된 대상들이 어떤 수익을 가져왔는지 상세히 밝히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국가가 아닌 회사나 금융상품을 평가하는 경우에는 지금처럼 회사 주식이나 금융상품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사는 사람에게 신용평가 비용을 받도록 해서 신용평가사가 고객(평가 대상 기업·금융사)에게 유리한 등급을 제공할 유인을 아예 없애야 한다.

신용평가를 제공하는 국제기구도 만들어야 한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금융 투자자들이 세계 여러 자산에 투자하는 세상에서 신용평가는 이미 하나의 국제적 공공재다. 따라서 질 높고 객관적인 신용평가를 제공하는 비영리 국제기구를 세우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국제기구가 생긴다고 굳이 기존 신용평가사들을 문 닫게 할 필요도 없다. 국제 도량형 표준처럼 꼭 한 기준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비영리 국제기구와 영리성 사기업들이 공존하면서 경쟁할 수도 있다.

신용평가 산업의 개혁은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금융개혁의 여러 의제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의약품 안전성을 인증하는 정부 부처에 대한 신뢰 없이 의약품 시장이 성립할 수 없듯이 신용등급 매기는 평가사들을 신뢰할 수 없다면 금융시장도 제대로 돌아 갈 수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